Nowhere Man's Land

라이프치히의 박요한 본문

길다

라이프치히의 박요한

Nowhere_Man 2026. 7. 4. 20:45
라이프치히의 박요한
― 1735년 어느 날의 기록

 

음악의 도시 라이프치히, 1735년의 어느날 오후. 시의 음악감독관 관사 안 작업실에 한 중년사내가 의자에 앉아 책상 위에 놓인 악보를 마무리 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사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피어 오르고 이윽고 그는 악보의 아래 쪽에 서명을 하려 하였다. 그러다가 잠시 머뭇거리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그는 이내 결심한듯 힘차게 펜으로 이름을 적었다.

“박요한”

 

그간 마음만 먹고 있다가 막상 그렇게 악보 위에 쓰여진 자신의 이름을 내려다보니, 스스로의 벅참이었는지 눈가에 옅게 이슬이 맺히던 그때였다. 악보 작업을 하는 동안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뜨개질을 하며 줄곧 곁을 지키던 한 여인네가 그런 그의 모습에 의아해 하며 잰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악보를 내려 보았다. 그러더니 여인네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펜 중 하나를 들어 잉크를 듬뿍 묻히고는 빠르고 단호한 손놀림으로 그가 써놓은 이름을 북북 그었다.

“아니, 부인! 이게 무슨 짓이오?”

화들짝 놀란 그가 다급하게 만류하며 소리를 쳤지만, 손길을 멈추지 않고 바로 대꾸하는 그 여인네는 바로 그의 두 번째 부인 막례였다.

“서방님, 대체 어찌 이리 경솔하오니까? 이곳 사람들의 속내를 아직도 모르십니까? 아버님이 하멜이라는 화란 선원을 따라 이곳에 온 조선인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답니까? 이들은 서방님의 핏줄이 고려인지 조선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나이다!”
“부인! 어찌 이리 무례하오. 부인은 알지 모르겠소만 내 젊은 시절 억울한 옥살이를 할 때 나는 결심 하였소. 언젠가 내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꼭 나의 뿌리를 밝히고 당당히 이들 앞에 나서겠다고 말이오!”
“제 정신이시오니까? 그리하면 당신의 음악과 악보는 아무도 사 주지 않을 것이고, 이곳 음악감독 자리에서 쫓겨날 터이고 궁전에는 발도 들일 수 없을 터이며 필시 추방 당하고 말 것이라는 걸 어찌 모른다고 하시오니까?”
“막례 … 내 그대를 안할트쾨텐의 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 바로 느꼈다고 하지 않았소. 분명 내 아버님 고향의 향기를 풍긴다는 것을 … 그리고 그대가 중국을 거쳐 물건을 무역하는 조선인의 딸이라는 것을 그대로부터 확인 했을 때 … 그래! 이 여인이 내 평생의 반려자가 분명하구나 하고 결심하였다 하지 않았소”
“서방님. 그걸 제가 어찌 잊었겠사오니까 … 허나 서방님의 집안과 작업실에 식솔과 제자들이 몇이나 되는지 생각을 하시고 하는 말씀이오니까 … 제가 그간 악보가게와 교습소를 운영하며 식량과 일용품을 벌어 온 것이 다 서방님과 서방님을 지키고자 한 것임을 모르시오니까?”
“부인 … 막례 … 내가 그걸 모르는 바 아니오. 허나 나에게는 내가 꼭 지키고 싶은 이름이 따로 있단 말이오 … 그리고 부인 …”
이 대목에서 그는 잠시 머뭇하다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막례의 얼굴을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부인이 내 ‘평균율 모음집’과 ‘대위법’을 멋대로 손대고 고쳐서 악보로 판매하는 것을 내 오랫동안 참아 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을 작정이오!”

그러자 막례는 요한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한참을 마주보다가 천천히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후우 … 서방님 … 서방님의 그 순수하고 더할 나위 없이 정교한 구성을 누구보다 제가 잘 아옵니다. 허나 그런 음악은 이곳 왕족과 귀족들에게 너무나 과분하고 난해하여 도저히 팔리지 않음을 또한 누구보다 제가 잘 아옵니다.”
“그 … 그렇지만 … 부인 …”

요한이 부인의 말에 뭐라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망연해 하고 있을 때 막례는 책상 위에 항상 비치하고 있는 인장을 찾아 손에 들고 잉크를 묻히는 것이었다.

“서방님, 부디 당부하오니 앞으로는 저를 그만 막례라 부르시오서. 저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안나 막달례나이옵니다.”

라는 말과 함께 조금 전에 이름을 지웠던 악보의 자리 아래에 그 인장을 힘껏 눌러 찍었다.

"Johann Sebastian Bach”

 

Fin.